<깨어난 침묵> : 침묵을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외치는 방법


글 : 성상민


처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들었을 때 기묘한 감정이 들 수밖에는 없었다. ‘깨어난 침묵’이라는 것은 침묵에서 깨어났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침묵이 결국 도래하고 말았다는 것일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이었다. 잠시 후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강하게 자신들을 압박하고 있던 침묵에서 깨어난 사람들, 그리고 다시 그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수를 부리는 이들. 제목에서 느껴진 중의적이며 역설적인 기운은 한국 사회 그 자체였다.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다루기

<깨어난 침묵>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간 박배일 감독이 만들어왔던 다큐멘터리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감독 자신의 고향이자 주된 활동 공간인 부산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 카메라를 비추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기울인다. <잔인한 계절>이 부산 지역의 청소 노동자들을, <나비와 바다>가 부산과 양산에 각각 거주하는 장애인 커플의 이야기를, <밀양전>과 <밀양 아리랑>은 부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번 신작 역시 ‘생탁’ 막걸리로 잘 알려진 부산합동양조의 노동조합 투쟁을 주제로 삼는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깨어난 침묵>은 기존에 작업했던 다큐멘터리와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들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은 물론 현장의 모습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위치도 정면 보다는 사선이나 구석에 놓여 있다. 사건을 들여다보는 방식 또한 어딘가 달라져 있다. 그간 박배일 감독이 만들었던 다큐멘터리는 사건 당사자의 내레이션을 상대적으로 최소화하며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 자체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에 가까웠다면, <깨어난 침묵>은 도입부부터 적극적으로 사건의 당사자인 부산합동양조 노동자의 인터뷰를 담아내고 사건의 현장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각각의 인터뷰 사운드를 중심에 배치하며 당시 현장에서 직접 사건과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의 심정과 회고에 중심을 맞춘다. 여기에 작중에서도 짐작할 수 있고, 감독도 여러 GV 현장에서 증언했듯 촬영 카메라를 노조 조합원들에게 직접 찍게 하는 시도까지 더해져 있다. 최종적인 편집 권한은 감독에게 있지만 이 작품에 드러나는 몇몇 카메라의 시선들은 실제 현장에서 투쟁했던 노동자의 시선을 거의 그대로 담아 내었다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연출 방식의 변화는 어찌 보면 그의 전작들에서도 종종 엿볼 수 있던 시도기도 하다. <밀양 아리랑>에서 송전탑이 세워진 다른 지역의 사례를 다룰 때 카메라를 송전탑 아래에서 수직으로 비추며 어딘가 기하학적인 동시에 불편한 감각을 낳는 송전탑 철근들의 조립된 모습들을 보여줬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깨어난 침묵>에 드러나는 독특한 시도들은 그간 조금씩 시도해온 연출의 실험들이 하나로 모인 결과물이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카메라와 영화의 시선이 사건의 정면을 비추지 않는 연출 방식은 부산합동양조의 노동 문제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진입 장벽을 높이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친절하게 부산합동양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차츰차츰 이야기를 꺼내면서 전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뉴스로는 알 수 없었던 현장의 이야기를 깊게 인식하게 만든다. 감독은 물론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이 익숙하거나 잘 알 것이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일부러 낯설게 만드는 시도는 미시적이지만 사건의 깊은 이해에 있어 중요한 지점들을 곱씹게 하는 것이다.




침묵에서 깨어나려는 사람들, 그리고 침묵을 깨우려는 사람들

작품의 제목에서도 강조하듯이 다큐멘터리가 주목하는 지점은 ‘말’이다. 작품이 시작하면 맨 먼저 보이는 모습들은 하얀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묵묵히 입을 닫은 채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과 달리 이들은 분명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말하고 자신이 그간 겪어 왔던 일들을 조금씩 말로써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의 목소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되지만 현장의 모습들을 그대로 담아낸 장면들을 제외하면 이들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는다. 마치 제목에서 느껴지는 역설적인 감각처럼 이들은 침묵하지 않고 있는 동시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서서히 드러나는 부산합동양조 투쟁의 모습으로 이어지며 조금씩 이유가 밝혀진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참아왔던 회사의 불합리한 노동 처우를 타파하기 위해 침묵을 깨고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 여겼던 지방노동위원회는 그저 노사 양자가 서로 ‘획기적’인 방식으로 양보하고 타협할 것만을 강조한다. 온갖 비위생적인 제조, 유통 과정을 통해 막걸리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동안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직접 폭로하고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식약처 관계자 역시 실태를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대신 노사가 화합하기만을 원한다. 노사 문제에서 큰 힘이 될 것이라 여겼던 정부 기관들이 도리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사이 조합원들의 입에 강제로 재갈을 물리려는 폭력들이 몰아친다. 사장들은 대놓고 조합원들에게 언어 폭력을 일삼고, 함께 일해 왔던 동료 일부는 회사에 포섭된 채 구사대가 되어 압박한다. 용역과 경찰의 물리적 폭력이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같은 말이지만 침묵에서 벗어나려는 말과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말이 혼재된 상황에서 다큐멘터리는 의도적으로 이 두 말들이 서로 충돌하며 고조되는 순간의 사운드를 제거한다. 아무런 이야기도 들리지 않은 채 그저 감독이 인위적으로 삽입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작품은 이미지만으로 그들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들려준다. 동료들이 구사대가 되어 회사를 지키려고 하는 순간 너무나도 열악한 공장의 위생 상태를 보여주며 과연 이 회사가 폭력을 쓰면서까지 무조건 감싸줘야 할 곳인지를 묻는다. 노동자와 회사 용역, 그리고 경찰이 서로 만나 충돌하는 순간 대체 누가 진정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반문한다. 이러한 연출은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이 다시 침묵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입을 아무리 다물게 만들고 싶어도 결코 다물게 할 수 없음을 표명하고 있다. 마치 하얀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입을 다문 표정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듯 말이다.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 드러나듯 부산합동양조 노동자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숨을 담보로 고공 농성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이 조차도 큰 성과를 낳지 못했고, 도리어 고공 농성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에게는 온갖 손해배상 청구와 법적 소송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해가 떠있을 때는 좀처럼 밖에 나오기 어렵다는 어떤 조합원의 증언은 이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가 어떤 파국을 낳았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말을 하고 있다. 온갖 수를 쓰면서까지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에 굴하지 않고 계속 거리에서, 그리고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는 <깨어난 침묵>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장서서 자기 지역의 문제를 밝혀야 할 지역 언론 대다수가 침묵하는 상황에서 감독은 그간 만들어 온 작품들이 그랬듯 소외되고 침묵을 강요받는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올려 더욱 멀리 전달한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사건을 전달하는 대신 영화적인 접근을 통해 사건을 좀 더 깊게 바라보려 시도한다. 한국 언론의 대다수가 침묵을 깨는 대신 침묵의 수호자로 암약하는 상황에서 현장 다큐멘터리로써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이러한 시도를 통해 더욱 독특하고 다양한 시선의 다큐멘터리가 나온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이 침묵을 부수고 나올 수 있지 않을까.


* 이 리뷰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관하는 116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행사를 위해 작성한 리뷰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 <깨어난 침묵>은 다큐멘터리 제작사 '오지필름'(ozifilm@hamail.net)을 통해 공동체 상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공동체 상영 신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여 주십시오.  → http://ozifilm.tistory.com/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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